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사치? === 왕비가 되고 [[사치]]나 [[도박]], [[유흥]]으로 밤새도록 [[연극]]을 보거나 무도회를 즐기는 방탕한 생활도 했다. [[도박]]을 좋아했지만 잘 하지는 못해서 빚을 많이 지기도 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비생산적인 퇴폐문화일 순 있지만, 이는 딱히 그녀가 방탕한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당대의 귀족 문화에 어울리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사교 활동이었다. 현대인들이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남들과 어울려서 비생산적인 오락문화를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설령 자금사정이 위험하더라도 적당히 허세를 부리며 한턱 쏠 줄도 알아야 하듯이, 18세기 유럽 상류층 역시도 사회생활을 위해 적당히 놀 줄 알아야 했다. 도박을 위해 빚을 졌다는 것 역시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막장 도박중독자로 보이겠지만, 당대에는 신용카드 결제 비슷한 감각[* 카드 결제도 빚을 지고 물건을 샀다가 나중에 갚는 외상거래 행위의 일종이지만, 카드값이 밀리거나 하지만 않으면 특별히 문제있는 행위로 보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큰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신용이 있는 인물이라면 외상빚을 일단 달아뒀다가 나중에 정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으로 빚을 지는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제 때 갚기만 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박에서 자주 졌다는 것도 당대의 맥락으로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인데, 당시에는 "귀족이라면 잃을 때 적당히 잃어주면서 놀이 자체를 즐겨야지, 돈을 따려고 너무 정색하고 달려드는 것은 천박하다"는 인식[* 도박으로 돈을 따 가며 생활을 유지하는 건 몰락귀족이나 방탕한 파락호, 즉 돈은 없지만 직접 일하기에는 사회적 지위가 다소 높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심지어 귀족 출신의 군인들도 봉급만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런 도박사 노릇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뒤마의 [[삼총사]]나 포레스터의 [[혼블로워]]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귀족들이 "돈 있는 우리가 도박놀이 하면서 아득바득 돈 따가면 쟤들은 뭐 먹고 살라는 거냐?"는 의미에서 더더욱 돈에 연연하지 않고 도박을 즐기기도 했다.]이 있었다. 즉 당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적당한 사치와 유흥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소위 말하는 '인싸'가 되기 위한 필수 선택이었다. 물론 유럽 귀족들 중에서도 마치 수도승처럼 검소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존경을 받거나 소위 '찐따' 취급을 당하거나 양자택일이었다. 이것 역시도 현대와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국왕 부부 중 남편인 [[루이 16세]]는 최상류층에서 어리숙한 바보 취급 당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국왕 부부의 '적당한 사치'가 필요했다. 사실 이 '적당한 사치'의 기준이 애매하기는 하다. 다시 현대의 예를 들어 '사회생활을 위해 적당히 놀 줄 안다'의 기준이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답이 궁색해진다. 그저 본인의 형편과 주변 시선에 맞게 해야 한다는 원론적 말만이 가능할 뿐이고, 정치인, 재벌, 연예인의 '적당한 사치' 기준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지지층이냐 반대층이냐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간다. 국왕 부부의 '사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이 16세 즉위 후 기록 되어있는 왕실 비공식 재정 지출 목록에 따르면 1789년까지의 왕실 소비 금액은 대략 2억 2천만 리브르였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예산 중 자신이 쓸 수 있는 금액 한도의 10%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소박한 이미지인 남편 루이 16세가 돈을 훨씬 많이 썼다. 루이 16세의 [[열쇠]]와 시계 만들기 취미는 당시 기술을 감안한다면 스위스에서 명품 부품 조달해서 고급 기계식 시계 만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단지 개인적인 취미활동이어서 티가 안 났을 뿐이다.] 약 100만 리브르에 가까운 금액인데, 당장 왕의 동생이었던 프로방스 백작만 해도 궁전 개축에 100만 리브르가 훨씬 넘는 돈을 썼을 정도니 이 정도면 '상대적으로 검소했다'는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는 셈이다. 하지만 100만 리브르라고 해도 당시 금 가격을 바탕으로 환산했을 때 대량 1천 2백억에 달하는 거금이다. 이러니 아무리 '상대적으로 사치를 덜 했다'도 반대층 입장에서는 '아무튼 사치를 하긴 하였다'가 되어버렸다.[* 사실 중요한 건 마리 앙투아네트가 대체 얼마를 썼냐는가가 아니라 과연 그녀가 프랑스 혁명을 유발할 정도로 돈을 많이 썼는가인데, 대체로 현대 역사가의 관점에서는 사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는 게 핵심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당시 프랑스의 재정상태가 최악이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재정은 태양왕으로 유명한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 이후 국내 상공업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위그노]]들이 외국으로 도피하면서 일차적으로 구멍이 생겼고, 그에 더해 [[샤를 8세|전]] [[프랑수아 1세|세]][[앙리 2세|대]][[루이 13세|의]] [[루이 14세|왕]][[루이 15세|들]]이 줄기차게 벌인 전쟁들, 특히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지원한 막대한 재정 지출 때문에 최악으로 치달아 있었다. 여기에 더해 조세 징수권은 [[징세청부업자]]들에게 진작 다 넘어가 있었고, 일찍이 [[명예혁명]]을 겪어 정치적 안정과 사적소유권을 보장하면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여 날로 성장하던 영국과의 격차도 벌어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기근까지 들자 프랑스 경제가 최악이 되었다. 그래서 당대 왕실의 재정 상태는 역대 왕실 중 가장 검소한 생활을 했던 이들조차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였고, 프랑스 국민들의 삶은 그냥 시궁창이었다. 그러니 민중들은 왕실 부부가 의외로 검소하더라 따위는 알 바 아니었고,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왕실, 그 중에서도 당장 눈에 보이는 왕비에게 분노가 집중되었다. 여기에 더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박하고 심심한 생활이 오히려 그들의 평판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선왕인 [[루이 15세]]까지만 하더라도 왕에게는 정식 아내인 [[왕비]] 말고도 공식 애인인 [[후궁|총희]](寵姬)가 있기 마련이었다. 왕비가 공적인 자리에서 왕실의 품위를 지키는 역할이라면, 총희는 [[사교계]]에서 왕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 때문에 왕이 주관하는 연회의 준비는 왕비보다는 총희의 책임이었고, 사교계의 이목도 왕비보다는 총희에게 집중되었다. 총희는 왕실의 일원이 아니라, 귀족 중에 수완이 뛰어나고 용모가 화려한 여성이 꼽히곤 했다. 즉, 일개 [[귀족]]이었다.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의 사치와 향략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은 왕가와 왕족보다는 [[욕받이|일개 귀족인 총희에게 돌려지곤 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여색에 별 관심이 없어 총희를 두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이 주관하는 연회와 같은 사교 행사의 준비를 총희가 아닌 왕비가 직접 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지엄한 왕가의 왕비가 직접 연회를 준비하는 모습이 서민들에게는 그저 '왕가가 사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 책임이 연회를 준비하는 왕비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전통적인 왕비처럼 얌전하게 행동하는 걸 원했다고 가정해도 부득이하게 행해야 할 상황인데, 심지어 마리는 외향적인 성품이어서 이런 행사에서 전면에 나서는 것 자체를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마리에 대한 비방이 강해진 것. 처음부터 연회를 하지 않으면 왕실이 사치를 부린다는 누명도 쓰지 않고 국가의 재정도 아낄 수 있겠지만, 당시 귀족들에게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리는 사교 행사는 정치의 장이기도 했다. 서민들 입장에서야 '[[높으신 분들]]의 향락'으로 보였겠지만, 나라의 유력자들이 모여 비공식적인 회담이 오가는 정치공간이었던 것이기에 그만두기도 불가능했으며, 행사 자체의 정치적인 성격도 분명히 존재했다. 호이징어의 <중세의 가을>에서도 상세히 다루는 이야기지만, 기본적으로 중세~근세 초기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근검절약, 또는 수입에 맞춰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었다'''. 수입의 규모에 맞춰 적절한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소시민의 미덕이었고[* 이 소시민의 미덕이 도시 시민계층의 미덕으로 이어지고 또 [[부르주아지]]의 미덕으로 이어져 근대~현대 사회의 미덕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귀족에게는 그 신분을 입증할 만한 과시적인 소비가 오히려 미덕, 또는 귀족 신분의 증거로 여겨졌다. 만약 '귀족 중의 귀족' 인 왕이 부족한 국가 재정을 염려하여 근검절약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현대인의 관점에서야 "똑똑한 왕이다", "명군이다", "훌륭하다"라는 칭찬을 듣겠지만, 중세 후기~근세 초기(즉 [[절대왕정]]기)의 관점에서는 "왕답지 못하고 좀스러운 모습"이라는 비웃음을 사기 쉬운 일이었던 것이다.[* [[루이 14세]]나 [[마리아 테레지아]] 등 절대군주들이 [[베르사유 궁전]]이나 [[쇤브룬]] 같은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과시하듯이 지은 것도 군주의 권위를 세우는 상징물 건설 → 왕권 강화 → 세금 더 뽑아내기 → 건축 무한반복… 이런 식이었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이는 [[의전]]이란 형태로 흔적이 남아 있다. [[대통령]]과 같은 국가 지도자가 의식주를 비롯해 각종 행사에서 그 격에 맞는 대접을 받고, 또 맞이하는 손님에게 그에 맞는 대접을 행하는 것은, 그 국가 지도자가 의전을 행해도 되는 국가 권력을 지녀서만이 아니다. 국가 지도자로서 걸맞는 의전을 행하는 것은 곧 지도자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이미지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전근대 신분제 국가의 군주라면 이는 더욱 필요했다. 결국 왕에게는 자신의 신분과 권위를 입증해보일 만큼 화려하고 과시적인 소비가 요구되었고, 수입이 부족하고 국가의 재정상태가 나빠서 지출이 어려우면 빚을 내서라도 왕의 신분에 걸맞는 과시적인 소비를 해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 그러다가는 그 빚을 못 갚아서 왕가와 나라가 망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싶을 텐데, 그게 바로 소시민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왕에게는 권력이 있으니 권력으로 해결하면 된다. 장래의 징세권을 팔아서 돈을 미리 땡겨쓰든지, 만만한 귀족에게 적당한 죄를 뒤집어씌워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든지[* [[성전 기사단]]이 이런 이유로 [[필리프 4세]]에게 털렸다.], 교회와의 갈등을 버틸 자신이 있으면 교회 재산을 몰수해버리든지, 그도저도 아니면 돈 빌려준 은행가가 망하든 말든 '못 갚겠다. 배째' 를 해버리는 방법이 있었다. 문제는 이런 수단을 사용하려면 왕에게 권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정치적 기량이 필요한데, 루이 16세에게는 그런 기량이 부족했다.[* 말하자면 남의 재산을 몰수하기엔 너무 착했고, 배째라고 버틸 만큼 뻔뻔하지도 못했으며, 뒤탈없이 뜯어낼 정도로 요령이 좋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미 팔 만한 징세권은 다 팔아버렸을 정도로 재정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이기까지 했다. [[루이 16세]]의 5대조 [[루이 14세]]와 조부 [[루이 15세]]는 프랑스의 절대왕정기를 대표할 만한 과시형 군주였고 이들의 화려한 과시적 소비와 전쟁 등의 과시적 국가행위에 의해 프랑스의 국고는 이미 더 짜낼 것도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거덜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밸런스가 맞으려면 루이 16세는 (선대 군주들의 과시행위로 물려받은 강력한 권위를 이용해서) 부유한 귀족 따위를 있는 대로 쥐어짜서 다시 국고를 채우는 폭군이 되었어야 할 포지션이었는데 이게 도무지 성격에 안 맞았다는 것이 루이 16세의 불행인 것.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비 자체는 프랑스 국왕 부부치고는 상당히 검소한 편이긴 했지만, 과시형 군주에게 2대나 시달린 당시 프랑스 왕국의 국고의 상태는, 왕실에서 소비를 좀 줄이고 검약하는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루이 16세의 치세는 과시적 소비를 미덕으로 하던 중세적 귀족의 시대가 끝나가고, [[계몽주의]]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시대였던 것도 문제였다. 이전 시기라면 당연한 것, 또는 왕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화려한 연회와 과시적 소비가 계몽사상가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그리고 지식인의 영향을 받은 대중들에게 비판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에서 왕은 사치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여 신민들에게 인식시켰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누린 [[루이 14세]]의 일화들을 보면 귀족들 앞에서 자신이 직접 춤을 추는 공연을 해보이거나, 귀족들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모두 보는 자리에서 [[먹방|자신이 식사하는 모습]][* 현대 한국의 정치인들이 기자를 대동하고 시장에서 음식을 사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이런 장면을 연출할 때 정치인 본인이 잘 먹지 못하면 정치적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과 같은 사생활까지 공개해 보였을 정도였던 것이다. 즉 당시 프랑스의 사회상에서 왕은 자신의 화려함을 가능한 한 공공연히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입증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사치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유럽]] 사회의 왕실 분위기가 다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루이 14세]]의 동생 [[필리프 1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아내로 [[팔츠 선제후국|팔츠]]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같은 경우엔 루이 14세와 오를레앙 공을 비롯한 프랑스 왕실 인사들의 지나친 식탐과 과시적 사치를 에둘러 비판하며 "내 생각에 왕이라면 모름지기 [[자우어크라우트]]와 [[소시지]], [[맥주 수프]]와 같은 영양가 있지만 검소한 식단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즉, 프랑스에 비하면 비교적 소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팔츠 선제후국]]의 정서와 [[서유럽]] 최대의 대국이던 프랑스의 정서는 달랐다.] [[루이 16세]]의 치세였던 근세 말의 프랑스에서 중세적 귀족의 시대가 끝나가고 새로운 시대([[계몽주의]]의 근대)가 태동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하는 것은, 일단 '지식인-시민계층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으로 몰락한' 루이 16세와는 달리 비슷한 시기 유럽의 다른 계몽군주들은 오히려 지식인-시민계층을 적극 양성하여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배경을 설명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루이 16세에게는 지식인 계층 출신으로 우수한 경제학자나 재정전문가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 자크 네케르, 에티엔 드 브리엔, 샤를 드 칼론이 있었으나,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재정 상황을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 더 나아가, 루이 16세는 귀족과 교회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과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만약 작정하고 이들을 찍어눌러서라도 세금을 매기려고 했을 경우, 부르주아 계층이 주도권을 갖게 된 군대는 왕의 편에 설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고 여겨진다.(실제로 혁명 이후에도, 군대는 귀족들의 편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 세력의 편을 들었다.) 즉 루이 16세가 새로운 시대의 동향만 잘 파악했다면 그 조류에 올라타서 상황이 혁명에까지 이르기 전에 당시 프랑스의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할 여지도 있었고, 심지어 일단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도 초기에는 주로 귀족 세력을 적대시했을 뿐 아직 루이 16세를 '우리의 왕'으로 여기던 혁명세력에 올라타 [[입헌군주제]] 정도를 받아들이는 대신 왕위는 유지하거나, 더 나아가서는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꺾고 나름의 왕권 강화까지 시도할 여지까지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회를 잃고 결국 왕의 처형과 왕정의 붕괴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